
2002년은 ‘파란’ 과 ‘역전’ 의 해였다. 당시 팝계는 최고의 스타 비욘세(Beyonce)가 이끄는 데스티니스 차일드(Destiny's Child)의 천하였다. [Survivor] 앨범은 걸그룹에 관련 된 모든 차트 기록을 바꾸며 ‘섹시코드’를 화두로 부상시켰다. 물론 그전에도 섹시함으로 어필한 아티스트는 많았지만, MTV 개국으로 시작된 ‘비디오 시대’로 다양해 졌던 비주얼 이미지의 대세가 ‘섹시’로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음악을 듣는 남성들에게는 흐뭇(?)한 선물이었지만, 획일적인 이미지를 봐야 하는 리스너들의 고통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2001년을 강타했던 알리샤 키스(Alicia Keys) 이후, 음악 자체로 승부하는 아티스트가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그래미(Grammy) 위원회는 작품성 있는 앨범을 찾지 못한 채 파리만 날렸다. 하지만 2002년 2월, 그래미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 터진다. 말로만 무성했던 블루 노트(Blue Note)의 신인, 노라 존스(Norah Jones)가 데뷔한 것이다. 앨범은 경이적이었다. 재즈와 포크팝을 적절히 버무려 놓은 음악으로 알리샤 키스에 이어 주요 부문 트로피를 모두 집으로 가져오는 잔인한(!) 범죄를 저질러 버렸다. 그렇게 노라 존스는 어덜트 컨템포러리(Adult Contemporary) 최강자로 우뚝 섰다. 어덜트 컨템포러리는 70년대 초부터 태동한 음악장르로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과도 맥락을 함께 한다. 노라가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는 동안, 포스트 노라 존스의 자리를 노리는 주자들의 경쟁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모든 세대가 함께 할 수 있는 컨트리를 내세운 테일러 스위프트(Taylor Swift), 아메리칸 아이돌의 히로인 캐리 언더우드(Carrie Underwood), 담백한 음악의 정점을 보여준 코린 베일리 래(Corinne Bailey Rae), 그리고 미국을 깜짝 놀래 킨 ‘제2의 피오나 애플(Fiona Apple)’ 사라 바렐리스(Sarah Bareilles)등이 대표적이다. 아직도 이들의 경쟁은 ‘현재진행형’ 이라는 점이 더욱 흥미를 끈다. 그러나 더 흥미로운 사실은 포스트 노라 존스 경쟁이 비단 미국과 영국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타이완의 노라 존스’ 조안나 왕(Joanna Wang, 왕약림)도 아시아 시장을 넘어 미국까지 매료시키며 포스트 노라 존스 경쟁에 도전장을 던진, 당찬 아티스트다.

조안나 왕은
“환상적이네요. 보이스가 감동적이에요. 그녀는 비틀즈와 린다 론스터드(Linda Ronstadt)를 떠올리게 합니다.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죠. 20년 정도 DJ 생활을 해왔지만, 듣자 마자 이렇게 감동받아본 앨범은 처음입니다. 절대 잊고 싶지 않아요. 절대로요.”
음악을 들으며 느끼는 감동은 억지로 짜내기 어렵다. 소리로 울림을 전달하고, 가사로 마음을 움직이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웨잉은 조안나가 억지로 만들어 내는 감정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감동을 전달하는 아티스트라는 걸 몸소 느꼈던 것이다. 그녀의 환상적인 보이스를 접하고, 외국 프로듀서들도 그녀를 돕겠다고 나섰다. 캐나다 출신의 랜디 벅맨(Randy Bachman), 닉 라세이(Nick Lachey), 리아나(Rihanna)와 작업한 루크 맥마스터(Luke McMaster), 백스트리트 보이스(Backstreet Boys), 미카(Mika)의 앨범에 참여한 바 있는 롭 웰스(Rob Wells) 등 아시아 시장에서는 만나기 힘든 프로듀서들이 대거 이름을 올렸다. 로스 엔젤레스(Los Angeles)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며 만나게 된 마이클 톰슨(Michael Thompson)과 같은 유명 세션도 앨범 완성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녀가 타이완 출신이라는 걸 감안하면, 정말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데뷔앨범 [Start From Here]는 팝보다는 재즈와 보사노바 느낌이 강한 어덜트 컨템포러리 넘버로 채워져 있다. 루크 맥마스터가 참여한 ‘Let’s Start From Here’ 로 앨범의 문이 열린다. 도입부의 피아노 연주가 인상적인 이 곡은 위대한 뮤지션을 향한 ‘시작’을 알리는 선언적인 싱글이다. ‘여기에서 시작해 보자’ 는 가사는, 어떤 이가 들어도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다. 노출 심한 옷으로 자극적 유혹이 난무하는 요즘, 조안나의 소박하면서도 발랄한 유혹은 신선한 충격이다. 보사노바 넘버 ‘Lost In Paradise’ 는 앨범에서 가장 멋진 곡 중 하나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떠올 릴 수 밖에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리사 오노(Lisa Ono)다. 리사 오노는 조안나와 많은 면이 닮았다. 영어로 노래 해 앨범을 발매했다는 사실, 그리고 비슷한 음악 장르를 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사실 ‘Lost In Paradise’는 리사 오노가 불러도 손색없을 것 같은 완성도 높은 곡이다. 하지만 이 곡을 들으면 조안나가 장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보이스의 미학에서 한 발 앞서가고 있으니 말이다. 비록 리사 오노보다 경험은 적지만, 경쾌한 리듬에서는 밝은 느낌을, 서정적인 리듬에서는 세련된 빛을 발하는 ‘완급조절형’ 보이스는 최고라 할 만 하다. 마틴 탕(Martin Tang)이 참여한 발라드 넘버 ‘As Love Begins To Mend’는 코린 베일리 래의 ‘Like A Star’를 떠오르게 한다. 세션에서는 차이가 난다. R&B와 소울 느낌을 내려 했던 코린과 달리, 재즈와 보사노바를 추구하는 조안나는 섹소폰을 비롯한 세션으로 음악의 후방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 조안나가 직접 작업한 ‘Bada Bada’는 경쾌한 팝 싱글이다. 자동차로 해변가를 달리면서 들어도 좋을 것 같고, 사랑하는 사람과 데이트 하러 가는 행복한 발걸음에 들어도 좋을 것 같다. 이 곡은 ‘감정’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주저함이 없다. 예술은 인간 감정을 반영하는 활동이다. 감정을 나타내는 데 있어서 자신감이 없고 확신이 없다면, 작품의 질이 떨어지고 만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대부분의 보컬리스트들은 감정 담는 법을 배운다. 조안나는 아주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인간사에서 느껴지는 ‘희로애락’을 드러내는 데, 그녀만한 보이스는 없다. 그래서 ‘축복받은 보이스’ 라는 찬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것 같다.
새침한 분위기가 가득한 ‘Lost Taipei’ 도 주목해야 한다. 역시 조안나가 직접 작업한 곡이고, 기승전결이 분명해 듣고 있으면 진행 과정이 머리에 그려진다. 점진적으로 느려지다가, 이내 발랄함을 되찾는 진행방식도 독특하고 맘에 든다. 앞서 지적했듯이 새침하고 도도한 여성을 연상시키는 기타 리프는 이 곡의 포인트다. 마치 친구들과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침해져서 입을 삐쭉 거리는 어여쁜 아이의 모습 같다. 귀로 느끼고, 머리로 그리는 음악의 미학을 안다면, 누구라도 즐거워 할 수 있는 곡이다. 캐나다 출신의 뉴에이지 프로듀서 데이브 픽켈(Dave Pickell)은 잔잔한 느낌의 포크 발라드 ‘The Best Mistake I’ve Ever Made’를 선사했다. 데이브 픽켈은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피아노 연주로 유명하다. 이번 작업에서는 피아노 연주로 앞서가지 않고, 보이스의 매력을 한껏 살리는 ‘보조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성숙한 실력을 선보이고 있다. 서정적인 피아노, 감각적인 기타 연주와 어우러진 조안나의 보이스는 가을을 부르는 ‘바람의 여신’ 이다. 낙엽이 질 때, 조안나의 곡을 들으며 산책을 해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단, 애상감에 젖어 청승맞은(!) 눈물을 흘리는 것은 금지다. 조안나의 음반을 듣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데이비드 타오가 참여한 팝 재즈 ‘I Love You’의 질감도 좋다. 물론 정통 재즈는 아니지만, 리스너를 편안하게 만드는 탁월한 재주는 여전하다. 다이애나 크롤(Diana Krall)보다는 어렵고, 제인 모네이트(Jane Monheit)보다는 쉽다. 나이는 어리지만 오랜 경력과 실험을 통한 정확한 접점, 조안나가 가진 최고의 장점 중 하나다. 아버지인 지핑왕이 함께 한 상큼한 트랙 ‘For No Reason’도 풋풋한 느낌을 전해준다. 마치 디사운드(D’Sound)의 ‘Do I Need A Reason’을 듣는 것 같은 싱그러움과 봄을 맞이하는 듯한 설레임이 탁월한 사운드의 세상으로 리스너를 안내한다. 랜디 벅맨이 영감을 불어넣은 ‘Now’는 다이도(Dido)의 곡을 듣는 기분이다. 다이도가 미국 시장에서 어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꾸미지 않은 담백함이었다. 오토튠(Autotune, 아티스트의 목소리를 기계로 조작하는 일)과 자극적 비트가 넘실대는 트렌드의 세상에서, 다이도의 순수함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아름다움 이었다. 결국 다이도는 단숨에 최고 스타로 부상했다. ‘Now’에서 감지되는 조안나의 모습도 그러하다. 인위적인 노출도 없고, 억지로 뽑아내는 보이스도 없다. 음악 본연의 가치를 추구하며, 물 흘러가듯 자연스러운 사운드를 연출한다. 이밖에 제이콥 영(Jacob Young)의 데뷔를 도왔던 게리 캠프가 이름을 올린 무드 있는 컨템포러리 ‘True’, ‘영원한 피아노맨’ 빌리 조엘(Billy Joel)의 곡을 피아노 아르페지오를 강조해 커버한 ‘New York State Of Mind’ 등도 주목할 만한 트랙이다.

조안나 왕은 짜릿한 시작을 알리고 있다. 세상에 많은 미덕이 존재하지만, 음악에서 가장 필요한 미덕은 ‘자연스러움’ 이 아닌가 한다. 예술은 인간이 만든 감정의 산물이다. 하지만 상업논리와 결합하며, 감정보다는 ‘돈’을 만드는 서글픈 현실이 되어버렸다. 조안나는 이런 상황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려 한다. 인위적이지 않은 순수한 아름다움, 이제 조안나 왕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던 가장 소중한 가치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글/팝컬럼리스트
원주 MBC 라디오 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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